반도체 겨울론은 어느 쪽 이야기인가: 고정비 구조와 양극화
“반도체 겨울이 온다”는 보고서가 나오면 관련 주가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HBM은 없어서 못 판다는 기사도 함께 나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지금의 반도체 시장은 한쪽은 혹한기, 한쪽은 호황인 양극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계산해 보면 같은 매출 10조 원이라도 HBM 비중에 따라 영업이익이 4.5배 차이 납니다.
이 글에서는 반도체가 왜 주기를 도는지, 그리고 왜 이번에는 갈라지는지를 숫자로 정리하겠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반도체는 증설에 2년이 걸려 3~4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합니다.
고정비 비중이 높아 가격이 원가 아래로 떨어져도 감산이 늦습니다.
이번 사이클은 범용 메모리와 AI 메모리(HBM)가 정반대로 갑니다.
1. 왜 3~4년마다 반복되나
반도체가 경기 순환형(시클리컬)인 이유는 공장을 짓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약 2년
가격이 오르는 것을 보고 여러 회사가 동시에 증설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물량이 시장에 나오는 것은 2년 뒤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요가 식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많이 만들 준비가 됐을 때 가장 안 팔리는 구조입니다.
반대로 불황에 투자를 멈추면 2년 뒤에 공급이 부족해집니다. 이 시차가 주기를 만듭니다.
2. 가격이 원가 아래여도 공장을 돌리는 이유
“적자면 생산을 줄이면 되지 않나”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반도체는 고정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입니다.
판가 100 → 변동비 빼고 +70 → 돌린다
판가 80 → 변동비 빼고 +50 → 돌린다
판가 50 → 변동비 빼고 +20 → 여전히 돌린다
판가 25 → 변동비 빼고 −5 → 그제야 멈춘다
공장을 세워도 고정비 70은 그대로 나갑니다. 그러니 판가가 원가(100)보다 낮아도 변동비(30)만 넘으면 돌리는 쪽이 손실이 작습니다.
이것이 반도체 불황이 길어지는 이유입니다. 모두가 적자를 보면서도 계속 만들기 때문에 공급이 줄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감산을 선언해야 바닥이 잡히는데, 그러면 점유율을 뺏기므로 서로 눈치를 봅니다.
3. 이번 사이클이 다른 점 — 갈라졌습니다
과거의 불황은 메모리 전체가 함께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 구분 | 범용(Legacy) 메모리 | AI 메모리 (HBM·eSSD) |
|---|---|---|
| 쓰이는 곳 | 스마트폰, PC, 가전 | AI 데이터센터, LLM 학습 서버 |
| 수요 | 교체 주기 길어져 둔화 | 빅테크 투자로 급증 |
| 공급 | 중국 증설로 과잉 | 기술 장벽으로 부족 |
| 가격 | 하락 압력 | 고부가 유지 |
범용 D램은 기술이 성숙해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보조금을 받아 구형 D램을 쏟아내면서 평균 판매 단가를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반면 HBM은 여러 층을 쌓아 올리는 공정이라 수율 확보가 어렵습니다.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제한되어 있고, 고객사와 장기 계약으로 물량이 미리 잡힙니다. 같은 ‘메모리’지만 사실상 다른 사업입니다.
4. 그래서 실적이 이렇게 갈립니다
매출 10조 원을 똑같이 올려도, HBM 비중이 0%면 영업이익 0.5조 원, 50%면 2.25조 원입니다. 4.5배입니다.
그래서 “반도체 업황이 좋냐 나쁘냐”는 질문 자체가 이제 잘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그 회사 매출에서 AI 메모리가 몇 퍼센트냐”입니다.
소부장은 더 갈립니다
장비와 소재 기업은 어느 쪽 라인에 납품하는지가 전부입니다. 범용 D램 증설에만 붙어 있던 회사는 겨울을 그대로 맞고, HBM 후공정에 들어간 회사는 같은 시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냅니다. ‘반도체 관련주’라는 묶음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5. 무엇을 보고 판단할 것인가
첫째, D램 현물가와 고정거래가를 나눠 봅니다. 현물가가 먼저 움직이고 고정거래가가 따라옵니다. 현물가가 몇 달째 오르고 있다면 바닥을 지났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둘째, 재고자산 회전율을 봅니다. 분기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고가 줄기 시작하면 가격 반등이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매출보다 먼저 움직이는 지표입니다.
셋째, 감산 발표를 주목합니다. 앞에서 본 고정비 구조 때문에 감산은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산이 발표되면 바닥이 임박했다는 강한 신호로 읽힙니다.
넷째, 설비투자(CAPEX) 계획을 봅니다. 지금 줄이면 2년 뒤 공급이 부족해집니다. 불황기의 투자 축소는 다음 호황의 씨앗입니다.
6. 겨울론이 나올 때 실제로 벌어진 일
“겨울이 온다”는 경고가 항상 맞았던 것은 아닙니다. 반도체 사이클을 돌아보면 비관론이 정점일 때가 오히려 바닥이었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유는 앞에서 본 시차 때문입니다. 실적이 가장 나쁠 때는 이미 감산과 투자 축소가 시작된 뒤입니다. 그 효과는 1~2년 뒤에 공급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주가는 그것을 미리 반영하려 하므로 실적 바닥보다 먼저 돕니다.
그래서 반도체 주식에서는 “실적이 좋을 때 비싸고 나쁠 때 싸다”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PER이 낮아 보이는 시점이 이익이 정점을 찍은 때일 수 있습니다.
시클리컬 주식의 함정
PER이 낮으면 싸다는 상식이 반도체에서는 거꾸로 작동합니다. 호황 정점에서는 이익이 커져 PER이 낮아 보이고, 불황 바닥에서는 이익이 줄어 PER이 높아 보이거나 아예 계산되지 않습니다. PBR이나 사이클상의 위치를 함께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7. 개인 투자자가 할 수 있는 것
첫째, 사이클을 맞히려 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도 자주 틀립니다. 바닥과 꼭대기를 잡으려는 시도보다 나눠서 들어가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둘째, 한 종목이 아니라 구성을 봅니다. 같은 반도체 기업이라도 AI 메모리 비중에 따라 실적이 4배 넘게 갈립니다. 종목 이름이 아니라 매출 구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셋째, 소부장은 특히 조심합니다. 대형 반도체 기업은 여러 사업으로 버티지만, 납품처가 한둘뿐인 소부장 기업은 그 라인이 멈추면 실적이 그대로 꺾입니다. 매출처 집중도를 사업보고서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지수 ETF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느 회사가 이길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반도체 지수를 따라가는 ETF가 개별 종목 위험을 줄여 줍니다. 다만 사이클 자체의 위험은 그대로 남습니다.
마무리하며
반도체 겨울론은 틀린 말도 맞는 말도 아닙니다. 어느 쪽 시장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기억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고정비 구조 때문에 불황이 길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번에는 범용과 AI 메모리가 갈라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뉴스에서 “반도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어느 쪽 이야기인지를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구분만으로도 같은 기사가 다르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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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가 구성과 마진율은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가정이며 회사와 제품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시장 상황에 대한 서술은 작성 시점의 일반적인 흐름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정 종목의 투자를 권유하는 글이 아니며, 투자 판단과 그 결과는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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